내일이 수능이라 수험표를 받기 위해 조금 빨리 퇴근해서 잠시 카페에 와 커피를 마시는데 옆에 여고생의 대화가 흘낏 들려와.
“우리가 이제 고3이 된다니. 징그럽다.”
“대학교 가면 못 볼 듯”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도 안 어색할 것 같은데”
“그냥 보자마자 존나 빠겔껄. 아니 성형해서 못 알아보는 거 아니가”
여자들의 우정과 남자들의 우정은 다를까 아님 별반 차이 없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어차피 저 둘의 우정도 영원 치는 못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괘씸한가?
각설하고, 잘 지내는가 자네. 네가 있는 그곳은 여기보다 가을이 조금은 더 빨리 왔는지도 모르겠네. 요즈음 보게되는 산들은 해 질 무렵이 아니라도 노을빛이고, 너무 뜨거워진 잎들은 이내 떨어지고 있어. 조금 쓸쓸해지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이상하게 듣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요즈음 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고 살아가려면 일을 계속해야 하고 지나간 시간들은 멀어져만 갔지만 이따금 씩은 날 너무 힘들게 해.
‘이러지 않았다면?’, ‘저러지 않았다면?’, ‘그럼 다시 돌아간다면 더 잘할 수 있겠어?’, ‘모르겠어’
‘미안해・・・・・・.’ 미안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 잘못 살아온 것만 같아. 이런 생각들이 가득해지면 토악질을 해버릴 것만 같아. 그냥 저냥 고개 끄덕거리며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푸념만 늘어놓아서 미안해.
육군의 복무기간은 21개월이니 입대 전 3개월에 생일이 있지 않으면 누구든 복무 중에 두 번의 생일을 맞게 되겠지? 난 한 번은 훈련소에세 이미 맞았어. 20살 생일은 퍽 씁쓸했는데 열댓 명의 사람들이 함께 축하해주니 살짝 찌잉했었어. 내년은 또 씁쓸하려나.
지구가 한 바퀴 더 돌아서 22살의 네 생일 오면 너나 나나 전역이 근 한 달 남아 기분이 묘할 것 같아. 그러고는 울진으로 돌아가겠지. 그럼 또 떠나자 그때는 유럽으로~
생일 축하하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너가 골라봐)
① 너와 내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11월 21일은 그저 가을의 한 날에 불과했을 텐데 너를 만나 이렇게 네게 편지를 쓰게 되고 다시금 인연에 감사함을 느껴. 고맙고 생일 축하해.
② 태어나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③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생일 축하해.
으아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면 조금 상투적이라도
④ 생일 축하해. 항상 고마워
우리가 학교 다닐 적에는 각 해마다. 그때는 초6이라던가 고2이라던가 하는 꼬리표가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제대하고 회사를 다니게 되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날들이 모여 작년이 올해 같고 올해가 작년 같은 때가 오지 않을까・・・・・・. 그러다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르게 되겠지. 그때는 울진 탈출했으려나.
뭐, 저건 꽤 먼 얘기인 것 같네.
다음 달에는 D-365이 있다! 그리고 설 쇠면 상병이다 야.
스페인어는 이제 안 한다고 했었나. 나도 일본어는 올해까지만 하고 안 하려고. 어떤 사람들은 하다가 마는 건 아예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던데. 글쎄・・・・・・. 난 살짝 맛만 보더라도 그것도 그 나름 의미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남은 1년 정도는 영어는 꾸준히 하고 여러 방면의 책을 읽어 보게. 전기회로나 전자회로 인강 들을 생각도 있고.
너네 부대에는 읽을 책 많나? 혹시 읽고 싶은 책 있으면 말해. 사서 보내줄게.
아주 가끔 요코하마 여행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사진 인화해야지 하는데 계속 미루게 되네. 여행 때에 너한테 미안한 것들이 조금 있네. 그리고 같이 가줘서 굉장히 고맙고 말이야.
추억팔이를 좀 하자면 씨파라다이스(맞나?)에 갔다가 버스를 잘못 타서 어쩌다 간 돈카츠 집에서 먹은 가츠동(돈가스 덮밥)이 잊히지 않는다. 넌 깨인가 소금인가를 막 가루 내고 있었지. 한국에서도 가끔 가츠동을 먹지만 아무래도 그냥 그렇더라. 그리고 코스모 월드에서 탄 빙빙 도는 놀이기구도 생각난다. 네가 다리 들어보라고 했던 그거. 지금 생각해도 재밌네.
아무래도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중 여행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가자 가자.
내가 잘 못하는 거지만 행복은 과거나 미래에서 찾는 게 아니라 현재에서 찾아야 하는 것 같아.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있는 게 아닐까.
감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야겠다.
다른 계절이 오면 또 편지해볼게
갑자기 생각난 건데 네가 만약 답장해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건 회신이야. 웃기다.
건강 잘 챙기고 감기 없이 겨울 보내자. 읽어줘서 고맙고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안녕.
2016년 11월 16일
정수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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